미국의 금리인상이 현실화되면서, 한국의 부동산시장 하락세를 예측하는 기사들이 연일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법률사무소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부동산 시장이 하락기에 접어들었다고 체감할 수 있는 지점은 분양계약 해제 관련 법률상담이 꽤 많아졌다는 점입니다.
아파트 분양계약 해제 사건을 단체소송으로도 수행해봤지만, 사실 소송을 의뢰를 위해 상담차 방문하시는 분들께 소송을 만류하고 돌려보내는 경우도 많습니다. 바로 '집행가능성' 때문인데요, 애초에 분양계약을 하기 전에 '이 정도는 미리 확인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건 '신탁' 과 '집행가능성'의 관계에 관한 문제입니다.
먼저 용어부터 짚고 넘어가면
시행사 : 아파트를 분양하는 최초이자 최종 보스(=사업주체)
시공사 : 아파트를 실제로 건축하는 건설사. 시행사가 시공사를 선택하는 것.
신탁사 : 시행사가 아파트를 지을 토지를 매입한 후 대출이나 다른 이유로 그 토지를 맡기는 회사. 시행사가 신탁사에 토지를 맡길 경우 시행사는 "위탁자"가 되고, 신탁사는 "수탁자"가 된다.
수분양자 : 아파트를 분양받은 사람
보통 아파트와 같은 공동주택의 경우 시행사가 토지를 매입한 후 해당 토지를 신탁사에 맡깁니다. 등기부등본을 보면 "권리자 및 기타사항"에 "수탁자 주식회사 OO신탁"이라고 기재된 경우가 이에 해당합니다.
아파트를 분양하는 시행사가 신탁을 활용하는 주요 이유 중 하나는 안정적입 시행사업을 위해서 입니다. 신탁법상 신탁된 토지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강제집행이나 가압류나 가처분과 같은 보전처분이 불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시행사가 어는 토지를 매입해서 아파트를 짓고 있는데, 시행사가 자금난에 시달리다가 시행사의 어느 채권자가 아파트를 짓고 있는 토지에 대해 경매신청을 해버리면, 수분양자들은 큰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일을 방지하고자, 시행사업에선 보통 해당 토지를 신탁사에 맡기게 됩니다. 그러면 설령 시행사가 자금난에 시달리더라도 수분양자들은 최소한 아파트를 짓는 토지가 다른 채권자들한테 넘어갈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됩니다.
여기까지는 괜찮습니다. 신탁사가 아파트가 들어설 토지의 소유자가 되어서, 수분양자들이 보호를 받을 수 있다니 괜찮아 보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역시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신탁사가 일개 수분양자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람들은 보통 아파트 분양계약서를 작성할 때, GS자이, 포스코더샾, 롯데캐슬과 같이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브랜드이면 시행사, 시공사, 신탁사가 어떻게 구분돼있는지 신경쓰지 않고 도장을 찍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분양계약서에 시행사, 신탁사, 시공사 도장이 다 찍혀있다고 하더라도, 분양계약의 계약당사자가 과연 누구인지, 신탁사인지, 시행사인지 구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일반적으로 분양계약서상 수분양자와 계약을 체결하는 계약당사자는 '시행사'입니다. 이게 무슨말이냐면 분양계약상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주체는 '시행사'라는 겁니다. 시공사가 건물을 잘못지어서 하자가 발생하더라도 수분양자는 계약당사자인' 시행사'에게 하자보수를 요구할 수 있는 것이지 '시공사'에 요구할 순 없습니다. 실질적으로 시공사가 하자보수를 해준다고하더라도 이건 어디까지나 시공사와 시행사 사이의 계약에 따른 것이지, 시공사가 수분양자에게 어떤 법적의무가 있어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간혹 분양계약서의 당사자가 '신탁사'로 돼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보통 시행경험이 없는 회사가 토지 매입만 완료한 후 신탁사에 토지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인허가, 분양업무 등 시행사업 일체를 신탁사에 맡긴 경우입니다. 사실상으로도 법적으로도 신탁사가 시행사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당연히 분양계약상 계약당사자인 '신탁사'가 분양계약상 모든 책임을 부담하는 겁니다.
하지만 신탁사가 시행사가 되어 계약당사자로서 분양계약을 체결하는 경우, 계약서 거의 마지막즈음에 "신탁사는 본 계약에 따른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거나, "신탁계약이 종료되는 경우 모든 신탁사의 모든 책임은 위탁자인 주식회사 OO에게 포괄적 면책적으로 승계된다"는 규정이 반드시 들어가 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합니다. 분양계약을 체결했는데, 이 계약의 당사자가 계약에 따른 책임을 부담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수분양자가 분양계약서상 입주예정일로부터 3개월이 지나도록 건축이 완료되지 않아 이를 이유로 분양계약을 해제하는 경우, 당연히 계약의 당사자인 신탁사가 분양대금을 반환해줘야 할 것 같은데, 분양계약서를 뒤져보니, "신탁사는 분양대금반환 등 본 분양계약에 따른 일체의 의무를 부담하지 않는다"라고 기재되어 있다면? 이렇게 말도 안되는 이상한 계약이 버젓이 행해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물론 신탁사가 분양계약의 당사자이면서, 계약의 본질상 책임인 계약해제시의 분양대금반환 의무를 면탈하는 계약규정은 계약서에 써져 있더라도 효력이 없습니다(왜 효력이 없는지는 글이 너무 길어지니 생략하겠습니다). 실제로 하급심 판결에서도, 설령 계약서에 '신탁사는 책임지지 않는다"고 써져있더라도 이런 말도 안되는 계약은 효력이 없다고 본 사례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탁계약이 종료되는 경우 신탁사의 모든 책임은 위탁자인 주식회사 OO에게 포괄적 면책적으로 승계된다"는 규정의 효력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따라서 분양계약해제를 원인으로 해서 신탁사를 상대로 분양대금반환청구 소송을 진행하는 중에 신탁계약이 종료되는 경우에는 위 규정에 의해 신탁사는 분양대금반환책임이 없어지니 소송은 패소할 수 밖에 없고, 실제로 1심에서 수분양자가 승소하였다가 항소심 진행중에 신탁계약 종료를 이유로 수분양자 패소로 뒤바뀐 사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탁계약 종료 후 원래의 시행사(=신탁회사에 토지를 위탁한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면 안되나? 제기해도 됩니다. 하지만 분양 사업 일체를 신탁사에게 맡기고 시행사업을 하는 회사의 경우 집행할 재산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이런 경우 원래의 시행사는 페이퍼컴퍼니와 유사한 정도의 회사인 경우가 많습니다). 애초에 시행사가 돈도 좀 있고, 시행사업을 스스로 할 수 있는 경우라면 토지만 신탁하고 나머지 시행사업은 시행사업은 직접 수행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굳이 돈이 더드는 방식으로, 분양사업 일체를 신탁사에게 맡기질 않습니다.
신탁사가 분양계약의 당사자라고 해서, 그 아파트는 절대 분양받으면 안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공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조금 지연되더라도 그에 대한 보상이 적절히 주어진다면 계약의 당사자가 신탁사인지 누구인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양계약서에 있는 규정을 잘 살펴보고, 분양계약의 책임을 최종적으로 누구 떠안는지, 최종적으로 책임을 떠안는 회사는 건실한 회사인지 여부는 계약서에 도장 찍기 전에 한 번 쯤은 살펴보길 추천드립니다. 프리미엄은 붙지 않고, 공사는 지연되고, 대출은 떠 안아야하는데, 소송으로도 해결하기 힘든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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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변호사 신원진의 네이버 블로그에도 실려 있습니다.
